‘실크로드’는 친근하면서도 낯선 단어다. 교과서에서 무수히 접하긴 하지만, 쉽게 갈 수 없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가깝고도 먼 곳이 바로 실크로드다. 하지만 이 실크로드를 10년 동안 발로 뛰고 누비며 서안에서 로마까지 실크로드의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온 사람이 있다. 바로 《삼국지》에 미쳐 《삼국지 기행》을 썼던 허우범, 그 사람이다.
지금까지 실크로드 책은 연구의 성과를 논문이나 학술서로 담아내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내용이 어렵기도 했지만, 현장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글과 사진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허우범 저자는 2004년 중앙아시아 한복판에서 실크로드를 처음 만난 뒤, 지금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실크로드 현장을 누비며 글을 써왔다. 그의 실크로드는 한마디로 ‘눈’과 ‘발’과 ‘땀’이 만들어낸 10년의 길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길에서 시작해 길에서 끝난다. 왜냐하면 실크로드가 바로 문명과 역사가 소통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 동서양 문명이 만나고 제국이 역사를 만들어가며, 이 길을 따라 사람들의 소통이 이뤄진다. 그리고 사막과 초원, 만리장성과 유목민족, 황하와 에밀레종이 만나던 바로 이 길에, 허우범 저자가 서 있다.
저자는 실크로드가 처음 열렸던 시점으로 돌아가, 영웅호걸들과 승려들, 그리고 촌부들이 이 길을 따라 희로애락을 엮어내는 모습을 보여 준다. 바로 이 길을 따라 당나라 최고의 국제무역 중심지인 서시가 서역상인들과 함께 풍요를 누렸고, 이 길을 지배했던 당 현종은 양귀비 때문에 비극적으로 몰락하기도 했다. 바로 이 실크로드를 갈망한 저자는 1,300여 년 전 실크로드 답사자로 나섰던 현장법사처럼, 우리 시대의 《대당서역기》를 그려내기 위해 30여 차례에 걸쳐 실크로드 곳곳을 누볐다.
저자가 안내하는 실크로드는 경제를 움직이는 길이요, 종교․학문․예술이 뒤섞이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지다.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자리다툼이 수천 년 동안 치열하게 이어졌다. 저자는 이 실크로드의 현장에서 흉노 왕 선우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한나라 황후, 중국의 역사를 뒤바꾼 실크로드의 외래종교 이야기, 21세기 중화제국 건설을 꿈꾸는 현대 중국의 숨겨진 의도까지 가감 없이 전한다.
이 책은 실크로드가 낳은 이런 역사의 명장면들과 그들의 삶이 한껏 배어 있는 유적지들을 수백 장의 현장 사진과 수십 장의 지도와 함께 풀어냈다. 저자와 함께 이 길을 걷다 보면, 사람들의 작은 발걸음이 만들어낸 실크로드가 역사와 문명을 어떻게 바꿔나갔는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세계를 만든 문명의 길, 그 끝에는 인간이 있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를 돌아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는 실크로드 대장정은 실로 방대한 길이다.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명멸하며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낸 이 길은, 끊어질 듯하다가도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되살아났다. 저자는 이 길을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치열하게 훑으며 자연과 인간이 교감했던 현장을 발로 뛰며 누볐다. 그리고 마침내 다툼과 고립을 넘어 소통과 화합이 화려하게 꽃을 피워낸 ‘위대한’ 길 실크로드를 만났다.
이 실크로드를 따라가면서, 저자는 한 무제의 신하가 된 흉노 왕자 김일제의 흔적을 추적하다가 고대 신라를 만나 놀라기도 하고, 문묘에서 21세기 실크로드를 타고 움직이는 공자를 만나기도 하며, 막고굴과 월아천처럼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모습에 넋을 잃기도 한다. 또한 여간촌에서는 중국으로 온 로마병사들이 남긴 흔적을 발견하기도 하고,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에서는 오랜 친구를 만나듯 자연스레 사막으로 나아간다.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한족 제국과 자웅을 겨뤘던 ‘서하’ 제국의 실체를 들여다보며 우리 고대왕국의 뿌리를 추적하고, 서역에서 신라 에밀레종의 전설을 찾아내는 등 세밀하고도 흥미로운 고증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자는 살아있는 실크로드를 만나기 위해 10년 동안 개인적인 시간과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으며, 실크로드의 흔적이 살아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집념으로 이 책을 낳았다. 4부 18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서안에서 시작해 감숙성의 천수와 무위, 가욕관 등을 거쳐 돈황에 이르기까지 황하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실크로드 ‘하서주랑 편’이다. 이 책은 각 부와 장마다 저자가 이동한 경로와 실크로드 유적지들이 표시된 지도를 제공함으로써, 실크로드의 현장을 보다 쉽게 만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문물이 오고가던 실크로드는 역사를 만들었고, 이 소통의 길을 통해 우리는 단절을 넘어 하나가 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그 어떤 것보다도 소통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요즘, 저자의 ‘실크로드 10년’을 압축한 이 책을 통해 동서양 문명이 함께 어우러지는 역동적인 소통의 현장을 만나보자.
■ 책 속으로
필자의 실크로드 여행은 2004년부터 시작됐다. 첫 발을 디딘 곳은 중국의 서안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한복판이었다.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던 낯선 문명이 ‘기다린 듯 반갑게’ 다가왔다. 순간, 필자는 실크로드의 낯설음에 깊이 매료되었고, 그것은 강렬한 끌림으로 필자의 가슴속에 ‘내단內丹’으로 남았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실크로드를 찾았다. 중국 서안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지중해를 돌아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는 실로 방대한 길이었다. 필자는 이 여행을 통해 ‘길과 문명’에 대한 생각을 보다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수많은 민족과 국가가 명멸하며 역사와 문명을 만들어내는 길. 끊임없는 생명력으로 되살아났던 바로 그 길.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가장 자연스레 이뤄지는 길. 다툼과 고립을 넘어 소통과 화합이 화려하게 꽃을 피워내는 ‘위대한’ 길. 이것이 바로 실크로드였다.
- 들어가면서 ‘역사와 문명을 만든 위대한 길, 실크로드’ 중(23쪽)에서
천하의 중심이었고 실크로드의 출발지였던 장안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실크로드가 번성한 것은 당나라 때이지만, 실크로드가 본격적으로 개척된 시기는 한 무제武帝가 다스리던 전한前漢 때였다. 이 때문에 입국 수속을 마친 필자의 첫 목적지도 당연히 무제가 잠들어 있는 무릉茂陵이다.
공항에서 서안으로 들어오는 길 옆 평원에는 크고 작은 구릉들이 흩어져 있다. 그런데 이것들은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 고도古都 장안에서 중국을 지배했던 황제들의 무덤이다. 서안에는 72개의 능이 있는데, 그곳에는 모두 73명의 황제가 묻혀 있다. 72개의 능에 73명의 황제라니? 그것은 당나라 고종의 건릉乾陵에 중국 최초의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합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 제1부 1장 ‘실크로드의 출발점, 서안에 서다’ 중(23쪽)에서
장안에서 교역을 마친 서역상인들은 수십 마리의 낙타 등에 비단과 도자기 등 새로운 상품을 싣고 하서주랑河西走廊을 통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넜다. 하서주랑만 넘으면 가격이 10배가 되고 사막을 건너면 100배가 뛰니 어찌 이 일을 마다하겠는가.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의 길을 통과했기에 이들이 지닌 물건들은 부르는 게 값이 되었고, 서역상인들은 시장의 수요에 따라 공급을 조절하며 더욱 폭리를 취한다. 생산자는 헐값에 넘기고 소비자는 비싼 값에 사야 했으니, 폭리를 취하는 중개인의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매일반이다.
- 제2부 7장 ‘머나먼 서역길, 하서주랑에 서다’ 중(180쪽)에서
“가난한 주종기술자는 아내에게 자식을 맡기고 종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아내는 먹을 것이 없어 우는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있던 차에, 한 시주승이 찾아와 시주를 하라고 떼를 쓴다. 화가 난 김에 ‘아이라도 가져가라!’고 내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시주승은 아이를 데려간다. 기일이 지나도 종이 완성되지 않자 주종기술자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태수의 불호령은 극에 달하고 시주승의 말을 들은 태수는 곧장 아이를 노爐에 넣어 종을 만들라고 명한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을 하는데 그 소리가 ‘엄마娘呀 엄마’ 하고 울려 퍼졌다.”
우리나라 경주에 있는 신라 성덕대왕신종인 ‘에밀레종’의 전설과 너무도 흡사하다. 아니 똑같다. 우리만의 고유한 전설이 담긴 에밀레종이라고 들었는데, 이역만리에 이토록 동일한 전설이 있다니!
- 제3부 13장 ‘서역에서 만난 에밀레종’ 중(356쪽)에서
2012년 6월, 중국 국가문물국은 장성보호공정의 1단계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역대 장성의 길이를 2만 1,196킬로미터로 늘려 발표했다. 동쪽으로는 흑룡강성 목단강까지, 서쪽으로는 신강성의 하미까지 그야말로 고무줄처럼 늘려 놓았다. 고구려의 천리장성인 노변강토장성老邊崗土長城, 발해의 목단강변장牧丹江邊墻, 고구려와 발해 때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연변고장성延邊古長城 등이 모두 중국의 만리장성에 포함된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 이후 불안전한 정치논리를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향후 몽골을 포함, 동북 3성과 관련해 한반도에서 발생할 문제에 대비한 치밀한 포석이 깔려 있는 것이다.
- 제4부 16장 ‘실크로드의 길목, 만리장성에 서다’ 중(462쪽)에서
그 옛날 번성했던 실크로드의 요충지에는 제국주의의 문화재 약탈과 파괴의 흔적이 거세게 남아 있다. 그들은 흡족해 했다. 자국의 텅 빈 창고에 타국의 보물들을 빼앗아 채워놓음으로써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고 문화대국임을 자랑했다. 하지만 이런다고 문화대국이 될 수 있을까?
부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서지고 빼앗기고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곧 새로운 극락을 건설하는 것임을. 비우고 내려놓고 다 내어줌으로써 보다 새롭게 꽃피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전 세계가 ‘돈황학’을 공부하고 돈황에 모여 그 가치를 더욱 찬란하게 승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 제4부 18장 ‘돈황에서 피어난 실크로드의 꽃’ 중(539쪽)에서
목차
◉ 차례
들어가면서 : 역사와 문명을 만든 위대한 길, ‘실크로드’ •4
제1부 세계를 만든 문명의 길
제1장 실크로드의 출발점, 서안에 서다 •12
제2장 한 무제, 서쪽으로 길을 열다 •38
제3장 비단길, 세계의 길이 되다 •62
제4장 당 현종, 실크로드를 지배하다 •90
제5장 현장법사, 실크로드를 타고 불교를 만나다 •118
제6장 당나라 장안, 외래종교를 품다 •148
제2부 제국을 만든 역사의 길
제7장 머나먼 서역길, 하서주랑에 서다 •180
제8장 황제신화, ‘중화제국’으로 비상하다 •198
제9장 중화문명의 시원, 황하를 가다 •220
제10장 물과 흙이 빚어낸 실크로드의 보물 •250
제11장 잃어버린 제국, ‘서하’를 찾아서 •280
제3부 동서를 이은 소통의 길
제12장 동아시아 끝까지 달려간 실크로드의 천마 •310
제13장 서역에서 만난 ‘에밀레종’ •344
제14장 실크로드가 맺어준 동서양 문명의 끈 •366
제15장 한 잔의 술, 역사를 만들다 •404
제4부 단절을 넘은 인간의 길
제16장 실크로드의 길목, 만리장성에 서다 •438
제17장 장성을 넘어 돈황으로 가는 길 •472
제18장 돈황에서 피어난 실크로드의 꽃 •512
찾아보기 •540
저자
■ 저자 소개
저자: 허우범
저자는 1961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문과와 동 대학원에서 융합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부터 삼국지, 초한지, 공자 등의 테마 여행을 시작하였고, 2004년부터는 실크로드로 범위를 넓혀 사막길, 초원길 에 이어 현재에는 바닷길을 탐사하고 있다.
이러한 여행 결과, <삼국지 기행> 출간에 이어 대하기행 <동서양 문명의 길, 실크로드 기행>을 기획하고 이제 그 첫 권을 집필하였다. 육로의 사막길을 다루는 본 기획은 중국 서안에서 출발, 둔황과 타클라마칸 사막, 톈산산맥 을 넘어 중앙아시아 5개국을 관통한다. 페르시아의 고향 인 이란, 열사의 중동, 동서양의 가교인 터키와 발칸반도, 그리고 인류 정신사의 근원인 그리스를 거쳐 실크로드의 종착지인 이탈리아 로마에 이르기까지 총 10여 권에 이르는 대하물이 될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 실크로드는 삶 그 자체이다. 그것은 실크로드가 동서양을 오가는 교역로만이 아니라 인류의 삶과 문명이 집약된 길이며, 과거의 길이 아니라 현재의 길이 자 미래로 나아가는 소통과 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 런 믿음으로 저자의 실크로드 문명 탐사와 소통은 지금 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