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조선의 27대 국왕들이 사대부들에게 유형무형의 다양한 ‘선물’을 증여함으로써 긴밀한 관계를 이어 나가는 흥미로운 과정을 담고 있다. 국왕들은 이 ‘선물’을 통해 사대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렸는데, 저자는 이와 관련해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의 수많은 문헌, 관련 인물과 유물들에 대한 역사적 사건과 비사까지 풍성하게 담아냈다.
국왕과 사대부를 이어 준 선물의 미학
선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국왕의 선물』 제2권. 선물은 마음과 마음을 맺어주는 끈이다. 특히나 조선 국왕의 선물은 국왕과 신하들을 이어주는 소통의 통로였으며 매개물이었다.
이 책은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이런 역할을 해온 선물의 증여를 살펴봄으로써, 정치권력과 선물이 어떠한 관계를 맺어왔고 바람직한 소통 방식과 선물 수수는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국왕이 신하에 대한 신뢰, 격려, 감사의 뜻을 선물로 표현하고 이에 대해 신하가 문서나 의식, 혹은 행동으로 충성을 서약한 방식을 알아본다.
신료, 공신, 종실, 부마, 지방관 등 사대부와 왕실 등 고위층에서부터 군인, 백성, 귀화인, 외국사절, 자신을 길러준 유모, 궁궐의 시녀에 이르기까지, 동옷과 초구 같은 의복에서 활, 화살, 말, 각종 서적과 문방사보, 약재와 음식물까지 다양한 인물에게 증여한 다양한 선물과 함께 조선 국왕이 증여한 유형무형의 선물을 통해 국왕이 사대부와의 공치를 이루어내고 대외적으로 국가권력의 상징성을 견지해 온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 책 속으로
영조는 재위 50년째 되던 1774년 6월 5일(정해), 특별히 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과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을 파직(罷職)했다. 이유는 그들이 하사 받은 제택(第宅)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창성위나 청성위는 국왕의 사위인 부마에게 주는 위호(位號)다. 그렇다면 대체 왜 황인점과 심능건은 하사받은 집에서 살지 않았을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중략) 황인점은 정조 연간에 여섯 차례나 사신으로 연경에 갔다. 사행은 청나라의 정세를 탐색하는 심세(審勢)의 임무를 지니고 있었고, 연행 중에 별단(別單)을 작성해서 비밀리에 신속하게 보고하고, 또 귀국한 뒤에는 대개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연행기 형태로 사적인 여정을 정리했다. 황인점이 정조의 명으로 6회나 사행을 한 것은 심세와 관련해서 특별한 밀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어떤 별단이나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그렇게 빈번하게 청나라의 정세를 관찰했으면서도 사적인 연행기조차 남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또한 정조 연간에는 탕평책을 와해시키려는 세력들에 의해 천주교 문제가 늘 부각되었다. 그렇거늘 황인점은 어째서 정조의 서거 후 순조 초에 이르러서야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을까? 혹시 화유옹주가 생전에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사랑을 받았기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 황인점이 보호받지 못한 것은 아닐까?
- 2권 18장 영조, 부마 황인점에게 저택을 선물하다
노량진의 용양봉저정은 용봉정(龍鳳亭)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정조가 재위 13년(1793년)에 수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행차하던 때 주교(배다리)를 건너 일시 머물던 행궁의 고옥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용양봉저정기>가 있다. 그 글을 보면 본래 망해정(望海亭)이라 했으나 정조가 주변 전망이 ‘용이 꿈틀거리고 봉황이 나는 듯하다.’라고 하여 그 이름을 용양봉저정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고종 때 부근에 철로가 놓이고 철교가 가설됨에 따라 한강을 배다리로 건널 필요가 없게 되었다. 1907년 겨울에 고종은 상왕으로 있을 때, 이 행궁을 유길준(兪吉濬)에게 하사했다. 유길준은 감히 행궁의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어 조호정(詔湖亭)이라 고치고 만년까지 이곳에 살았다. (중략)
고종은 본래 유길준을 친일파로 생각했으나, 유길준이 정미 7조약을 반대했다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했다. 더구나 1907년 8월 16일에 일본 통감부가 벼슬을 줄 때, 일본에 망명했다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유길준만이 일본이 주는 벼슬을 받지 않았다. 고종은 용양봉저정을 유길준에게 하사하고, 순종을 시켜 그 편액의 글씨를 쓰게 했다. 이관규 님에 의하면, 유길준이 이때 흥사단을 만들어 교육 사업을 벌이자 상왕인 고종은 1만 원의 찬조금을 내리고, 또 수진궁(壽進宮)을 사무실로 쓰도록 했다고 한다.
- 2권 29장 고종, 유길준에게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다
<유릉지문>에 따르면 순종은 황제로서 백성들의 의지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종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순종은 “난 예 있기 진저리가 나, 난 너무 괴롭기만 해.”라고 되뇌었다고 했다. 일본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국가 전역에 왕의 명령을 유시(諭示)할 수 없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렇기에 순종은 신하들에게 황제로서 의미 있는 선물을 할 수가 없었다. 총독부의 지시대로 일본의 군사들에게 하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략)
순종이 서거한 후 1927년 4월, 이왕직은 순종의 재위 4년간과 퇴위한 뒤의 17년간에 이르는 사적을 편찬해서 《순종실록》을 엮었다. 그러나 그 편찬위원장은 이왕직 장관 종3품 훈1등의 일본인 시노다 지사쿠(篠田治策)였다. 또 감수위원에는 오다쇼고(小田省吾), 나리타 세키나이(成田碩內) 등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전체 원고를 조작했을 것이다. 시노다 지사쿠는 간도 용정촌(龍井村)의 통감부 임시간도파출소에 부임해서 1909년 11월 1일 파출소가 폐쇄될 때까지 간도 영유권 문제를 조사했다. 그 뒤 이왕직 장관을 지냈고, 1940년 7월부터 1944년 3월까지 경성제국대학 총장으로 있었다.《순종실록》에는 순종이 매국노들과 일본인들에게 서훈(敍勳)하고 일본 군대에게 하사금을 준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순종 융희 2년 3월 28일의 기록에 보면 일본 육군 기념제에 맞춰 하사금 1,000원을 일본군 주차사령부(駐箚司令部)에 주었다고 되어 있다. 아마도 친일관료들이 하사를 강요했을 것이다. 또 《순종실록》의 편찬자들은 일본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순종 황제가 친일파와 일본인, 그리고 일본 육군에 대해 하사한 사실만 부각시켰을 것이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순종이 황제로서 온당한 하사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다.
- 2권 30장 순종, 일본군 주차사령부에 1,000원을 하사하다
목차
책머리에
1장 광해군, 좌의정 정인홍에게 표석을 내리다
2장 광해군, 허균에게 녹비 한 장을 내리다
3장 광해군, 강홍립의 군사에게 목면을 하사하다
4장 인조, 승지 이경석에게 황감 열 개를 내리다
5장 인조, 청나라 심양으로 들어가는 최명길에게 초구를 내리다
6장 인조, 이식에게 도원의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내리다
7장 인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에 동종을 선사하다
8장 효종, 김육에게 요전상을 하사하다
9장 효종, 사부 윤선도에게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다
10장 효종, 송시열에게 《주자어류》를 내사하다
11장 현종, 광주목사 오두인에게 말을 내려 주다
12장 숙종, 81세의 허목에게 궤장을 내리다
13장 숙종, 황해도의 이정암 사우에 편액을 하사하다
14장 경종, 진주사 이건명에게 안구마를 하사하다
15장 영조, 이인좌를 붙잡은 농민 신길만에게 상현궁을 하사하다
16장 영조, 팔십 노인 정제두에게 낙죽을 내리다
17장 영조, 기술자 최천약에게 은그릇을 내려 주다
18장 영조, 부마 황인점에게 저택을 선물하다
19장 정조, 홍국영에게 사모를 내리다
20장 정조, 남한산성 수어사 서명응에게 고비를 하사하다
21장 정조, 검서관 이덕무에게 웅어와 조기를 내려 주다
22장 정조, 직제학 이만수에게 나막신을 하사하다
23장 정조, 정약용에게 《시경》의 문제를 숙제로 내다
24장 순조, 국구 김조순에게 내구마로 시상하다
25장 헌종, 4년 만에 권돈인에게 영의정 해임의 청을 들어주다
26장 철종, 정원용의 회혼례에 장악원의 이등악을 내리다
27장 고종, 최익현에게 돈 3만 냥을 선물했으나 최익현은 받지 않다
28장 고종, 을사오적 살해에 실패한 이기를 특별 사면하다
29장 고종, 유길준에게 용양봉저정을 하사하다
30장 순종, 일본군 주차사령부에 1,000원을 하사하다
부록1 _ 조선의 국왕과 가족
부록2 _ 이 책에서 다룬 국왕의 선물 증여
도판목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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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심 경 호
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1955년 충북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 과정 졸업. 일본 교토(京都)대학 문학박사. 한국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과 강원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의 조교수를 거쳐, 고려대학교 문과 대학 한문학과 교수 역임.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장 역임.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단독 및 공저 1-4), 『조선 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국문학연구와 문헌학』, 『한학입문』, 『한국한문기초학사 1-3』, 『다산과 춘천』, 『다산의 국토 사 랑과 경영론』,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김시습평전』, 『안평 :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한국한시의 이해』, 『한시 기행』, 『한시의 세계』, 『한시의 서정과 시인의 마음』, 『한시 의 성좌』, 『김삿갓 한시』, 『한문산문의 내면풍경』, 『한문산문 미학』, 『간찰 : 선비의 마음을 읽다』, 『내면기행 : 옛 사람이 스스로 쓴 58편의 묘비명 읽기』, 『산문기행 : 조선의 선비 산 길을 가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 선인들의 자서전』, 『참요』, 『옛 그림과 시문』, 『한국의 석비문과 비지문』, 『호, 주인옹의 이름』 등 30여 종이 있다.
역서로 『주역철학사』, 『불교와 유교』, 『동성문파술론』, 『일본한문학사』(공역), 『금오신화』, 『한자학』, 『역주 원중 랑집』(공역), 『한자 백가지 이야기』,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일본서기의 비밀』, 『증보역주 지천선생집』(공역), 『서포만필 1-2』, 『삼봉집』, 『기계문헌 1-6』, 『심경호 교수의 동양고전강의 : 논어 1-3』, 『육선공주의 1-2』(공역), 『동아시아 한문학 연구의 방법과 실천』, 『도성행락(圖成行樂)』, 『여유당전서』(시) 등 30여 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