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구치 에리야의 현대적 해석으로 재탄생한 <신곡>을 고흐가 ‘최고의 민중화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19세기 천재 화가 구스타브 도레의 생생한 삽화로 즐기자!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가 쌓은 장편서사시의 전통을 잇는 불멸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신곡>은 단테의 인간적 고뇌와 슬픔, 사랑, 희망 등이 작품 전반에 걸쳐 녹아 있어 문학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수작이다. 훌륭한 가문과 명석한 두뇌, 지도자로서 뛰어난 자질을 지녔음에도 정치적 상황과 음모로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도시인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모든 역량을 이 책을 완성하는 데 쏟아 부었다.
단테는 당시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사회문제를 예리하게 분석하고 풍자했다. 그가 살았던 14세기와 지금의 21세기는 사회구조나 가치관 등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임에도 여전히 <신곡>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 작품에 절묘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문학과 철학, 정치학, 신학, 수사학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형식으로 인간의 욕망과 죄악, 운명과 영혼의 구원을 심오하게 그려낸 고전이다. 이 책은 그런 단테의 방대한 원작을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전방위 아티스트 다니구치 에리야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원작의 무게와 느낌은 그대로 유지한 채 내용을 쉽고 간결하게 엮어 썼다. 거기에 ‘근대 일러스트레이션의 아버지’이자 고흐가 ‘최고의 민중화가’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19세기 천재 화가 구스타브 도레가 역동적이면서 환상적으로 표현한 삽화 121점이 곁들어져 보는 이에게 내용을 한층 더 생동감 있고 사실적으로 전달해 준다.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도레의 판화 구스타브 도레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는데, 열한 살에 석판화 기술을 배워 열다섯 살에는 그림 이야기책을 출판한 천재 화가다. 당시의 사회를 풍자하는 시사적 내용의 그림을 그려 일약 유명한 화가가 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꿈꿨던 고전을 판화로 시각화하는 원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을 단테의 <신곡>으로 삼았다. <신곡>의 세계관과 독특한 상상력은 도레 이전에도 많은 화가를 자극했고, 보티첼리 등 여러 화가가 이것을 테마로 다양한 장면을 그렸지만 도레처럼 전편의 주요 장면을 모두 그린 예는 없었다. 구스타브 도레의 작품은 세밀하고 사실적이며 거친 듯한 생생함이 묘미다. 19세기 대중은 이 새로운 작품에 열광했는데, 사실적이지만 환상적인, 진지하지만 파격적인 느낌을 절묘하게 공존시키는 그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도레의 그림은 선하건 추하건 인간의 본성을 과감한 터치로 역동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는데, 인간의 한계와 영혼의 방황, 구원에 이르는 거대한 상상력이 단테의 <신곡>과 만나 더욱 빛을 발한다.
책 속으로 나는 삶의 어느 순간에 참된 행복의 길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운 숲 속을 헤매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얼어붙고 몸이 떨린다. 끝도 없이 펼쳐진 원시의 숲, 가슴이 오그라들 듯한 공포, 그것은 죽음보다 깊고 어두운 세계였다. 왜 나는 그런 곳에 있었을까? 아니,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을까?나는 참으로 이상하고 신비로운 여행을 했고, 그리하여 그곳에서 지고의 선으로 가득 찬 빛의 세계를 보았다. 아, 그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었다. 내 가슴은, 그 체험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 거기서 내가 보았던 것을 하나하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말할 것이다. (10쪽)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시대 최고의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 <아이네이아스>는 시인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전통을 잇고 있다.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가 성을 잃은 후, 온 세상을 방랑하고 명계冥界까지 가 본 후에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된다는 이야기로, 베르길리우스는 만년의 십일 년을 이 작품을 위해 바쳤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유럽의 정신사에서는 예언자가 사상적인 선구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데, 역대 시성들 또한 그런 예언자의 계보에 속한다. 이 장면에서 베르길리우스의 확신에 찬 말도 예언자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단테의 <신곡>은 그런 예언자와 시인의 작품을 의식하면서 쓰인 것이다. (엮은이 주—16쪽)
우리는 재빨리 그 계곡을 빠져나와 지옥의 제팔 영역, 여덟 번째 사악한 구덩이로 향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혹시 인간과 뱀은 같은 근원에서 태어난 것이 아닐까? 독을 가지고 있고, 둘로 갈라진 혀와 차가운 피부로 구멍을 찾아 땅을 기어가는 모습은…… 차라리 그 광경은 보지 말았어야 했어.’ “조심하게, 단테. 잘 보게, 발아래를. 아주 험한 길이야. 떨어지지 않으려면, 눈을 부릅떠야 하네.” 스승의 말에 제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잘 보게. 음모와 책략으로 세상을 매도하고, 마치 장난을 치듯이 전쟁을 즐긴 놈들이 지금 저런 불길 속에서 고통 받고 있다네. 놈들의 행위는 너무도 치사하고 더러웠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108쪽)
뚜쟁이, 아부꾼, 성직 매매, 사기, 직권 남용, 위선, 도둑. 인간사회를 더럽히는 모든 악행을 범한 자가 거기에 합당한 사악한 구덩이에서 벌을 받는 지옥의 제팔 영역 가운데서도 두 사람은 일곱 번째 사악한 구덩이까지 견학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죄악을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비행을 저지르는 자가 너무도 많다. 혹시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단테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앞으로 더 깊고 거대한 음모와 모략의 죄를 심판하는 지옥으로 내려간다. (엮은이 주—108쪽)
저자․역자소개 지은이_알리기에리 단테 Alighieri Dante 이탈리아가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 피렌체의 소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고전문법과 수사학을 배웠다. 중세 유럽의 학문적 전통을 총괄하는 기념비적인 대작 <신곡 La Divina Commedia>은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인간 영혼의 정화와 구원에 이르는 고뇌와 여정을 그렸다. 당시 권력의 당파싸움에 휘말려 피렌체에서 추방당한 단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대 정치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풍자했다. 시 외에도 <제정론 De Monarchia> 등 여러 이론적 저술을 남겼다.
그린이_구스타브 도레 Gustave Doré ‘세계 고전을 독특한 상상과 구도로 구상화한 근대 일러스트레이션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석판화를 배웠으며, 파리에서 발간되는 한 풍자잡지에 삽화를 그리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유행한 화풍을 배격한 채 정확한 소묘력과 극적인 구도로 환상과 풍자의 세계를 독특하게 구현해냈다. 그는 클래식한 장엄미, 디테일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절묘하게 녹은 삽화로 세계 명작의 판화본을 계획하고 제작에 들어갔다. <신곡>을 시작으로 <성서> <돈키호테> <실락원> <라 퐁텐 우화> 등으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는 단순한 삽화의 개념을 넘어 명화에서 깊이와 울림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고전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삽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신곡> <돈키호테> <실락원> <성서> <십자군의 역사> <국왕목가> <라 퐁텐 우화> 등이 있다.
엮어 쓴이_다니구치 에리야 谷口江里也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로서 ‘상상’과 ‘표현’, ‘변화’를 주제로 다채롭게 활동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요코하마국립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건축, 인테리어, 무대미술, 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독자적인 공간창조 개념을 표현했다. 주요 저서로 <신곡> <구약성서> <부드러운 여신> <물의 언어> <바람의 기억> 등이 있으며, <구스타브 도레> <쟈크 카로> <그란빌> 등 화집이 있다.
옮긴이_양억관 국내에서 손꼽히는 일본문학 번역가로 소설, 인문, 교양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번역했다. 주요 역서로 <용의자 X의 헌신> <모방범 1․2․3> <냉정과 열정 사이> <관중> 등이 있다.